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경인선 전철의 시작은 인천역에서 출발한다.
인천역 다음 정거장인 동인천역 주변은 한때 인천에서 최고 번화가였다.
항상 인파로 북적거렸던 쇼핑과 데이트, 만남의 장소였다. 거기서 만나 자유공원으로 올라가곤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과거의 활기를 찾아보기 어려운 원도심으로 변했지만, 동인천 곳곳에는 교복세대들의 아련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시민 누구나 알던 랜드마크인 약속 장소
동인천역 주변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 최대 상권을 형성했다.
일명 '양키시장'으로 불리던 지역에서 가장 큰 혼수시장인 중앙시장을 비롯해 송현시장과 청과시장이 이 일대에 있었다.
인천 최초의 지하상가도 1960년대 동인천역 앞에 들어섰다.
동인천역 주변은 제물포고·인일여고 등 역사가 오랜 학교들이 모여 있고 인천의 거의 모든 시내버스가 지나던 교통의 중심지였다. 대한서림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지금의 동인천역 맞은편에 황해도 출신의 고(故) 홍용선 씨가 문을 열었다.
이후 1978년 홍씨의 사위인 현 회장이 서점을 물려받았고, 1989년 원래 자리 옆에 있던 지금의 건물을 매입하며 지역을 대표하는 서점으로 키워냈다.
당시에는 6층짜리 건물 전체가 서점이라는 점도 놀라웠지만, 투명한 유리로 밖이 내다보이는 최신식 엘리베이터도 섬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가 될 정도로 명물이었다.
서점 업계 이끌던 전성기 뒤로 하고 폐업 위기도
오랜 역사와 명성만큼이나 다양한 혁신 노력을 통해 국내 서점 업계를 선도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서점 관리 전산시스템과 유니폼을 우리나라 서점 중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지역에서 유일하게 주민을 위해 국정교과서와 방송통신대 교재를 공급하는 공적인 역할도 20년 이상 담당했다.
하지만 번화가였던 동인천이 1990년대부터 점차 쇠락을 길로 접어들고 전국적으로 온라인 서점들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대한서림도 경영난을 피하지 못했다.
급기야 2015년 3월 서점 문을 닫기로 하고 서점 건물 전체를 임대 매물로 내놓기도 했다.
학생 인구 감소와 낮은 독서율이 서점 운영을 어렵게 만들었고 옛 명성에 의존해 버티는 것도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당시 대한서림의 폐업 방침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자 "영업을 계속해달라"는 인천 시민들의 호소가 이어졌고, 여론이 급속히 확산하자 결국 서점 측은 폐업 방침을 철회했다.
20년 넘게 일한 가족 같은 직원들이 명맥 이어가
건물 전체를 사용했던 옛 영화를 뒤로하고 지금은 2∼3층만 서점으로 쓰고 있다. 1층은 이동통신사, 4∼6층은 치과에 공간을 임대한 상태였다.
평일 오후 시간대라고 해도 2층과 3층 서점 매장에 있는 고객 수가 모두 합쳐 10명을 넘지 않았다.
동인천의 명소 대한서림을 기억하는 고객들이 잊지 않고 찾아오고 있지만, 직원들은 급여를 줄여가며 어렵게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다시 손님이 북적대는 지역의 대표 서점으로 거듭나기 위해 여러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
교내 도서관에 책을 납품하기 위해 직접 명함을 들고 초·중·고교를 찾아가는 말 그대로 발로 뛰는 마케팅을 하고 있다.
또 서점을 방문한 고객이 찾는 책을 매장에 비치하지 못했을 경우 집으로 직접 배달해 주는 배송 서비스도 하고 있다.
대한서림이 70년 넘게 '인천 원조 서점'의 명맥을 이어가는 원동력으로 20년 넘게 함께 일해온 네 명의 직원들이 있다.
"많은 분들의 소중한 추억이 깃든 대한서림이 인천의 대표 서점으로 오래 남도록 더 열심히 뛰겠다"고직원들은 말했다.